나폴레옹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침착했다. 심지어 그는 전복된 차에서 일리야를 직접 끌어내고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 미리 준비해둔 차량으로 데려갈 때에도 딱 계획한 만큼 사고하고 반응했다. 멀리서 지켜보았을 가비도 그가 그토록 차분하게 이번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을 터였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가 안전가옥을 향해 달리는 동안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창밖만 바라보는 일리야의 머리에 난 상처 위로 천을 다시 덧댔다. 붉게 묻어나온 피에 심란하다가도 눈앞에 앉은 일리야의 존재에 더 크게 울컥하는 마음에 그는 억지로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켜야 했다. 그러면 스멀스멀 올라오던 것이 잠시나마 뒤로 넘어갔다. 바깥풍경만 보고 있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도 어쩌면 그래서 나폴레옹을 돌아보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나폴레옹이 일리야를 탓할 처지도 아니었고, 일리야가 나폴레옹을 탓할 처지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잘 알기에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비슷비슷한 모양을 한 건물들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던 일리야는 차가 약간 덜컹했을 때에야 눈동자만 굴려서 나폴레옹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생각대로 나폴레옹은 많은 것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했다. 일리야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따뜻한 손이 일리야의 차가운 손 위에 와 닿았다. 그제야 일리야는 자신이 이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몸을 부들부들 떨 때마다 진정하라는 듯이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던 이가 너였지. 일리야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눈가에 물기가 미미하게 묻어났다.

 

 

*

 

 

한적한 주택가에 들어선 자동차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게 변한 흰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창밖만 보고 있던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먼저 내려서 제 쪽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는 지혈을 하느라 눌린 머리를 한 채로 나폴레옹을 올려다보았다. 나폴레옹은 잠시 일리야가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일리야는 내릴 기미가 없어보였다.

 

여긴 안전해.”

 

나폴레옹은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확신해?”

 

일리야는 침을 삼켜보았지만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날선 내용과는 달리 다소 단조로운 투에 나폴레옹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열어서 잡고 있던 차문에 몸을 약간 기댔다. 안전가옥에 안전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상대적으로 좀 더 버틸 시간이 있다는 뜻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바로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붙잡혀서 혹독한 신체고문까지 당했으니 날카롭게 굴만도 했다. 잠시 나폴레옹은 적절한 대답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답했다.

 

현재로썬.”

.”

 

별로 탐탁지 않은 답이란 것을 나폴레옹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일리야는 피딱지가 않은 입술의 한 쪽 끝을 올렸다.

 

너와 나는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는 칼끝에 서있었지. 지금도 그렇고.”

일리야.”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지금도 그러하다는 첨언에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일리야가 고집을 부리며 다시 제 발로 생지옥에 돌아가겠다고 할까봐 덜컥 겁부터 났던 것이다. 어떻게 찾았는데 다시 잃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사고는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만 가리키고 있었다. 일리야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억지로 그것마저 꾹꾹 눌러 담고 있었는데 일리야가 저렇게 불안한 말을 하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고 했다. 게다가 어둑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에 움푹 팬 뺨이 얼마나 안타까워 보이는지 본인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늘 자신보다 컸던 일리야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리야는 작게 숨을 내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차 밖으로 다리를 뻗어 나오면서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조금 비틀댔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반사적으로 뻗은 손을 얼른 단단히 잡고 그를 부축했다. 그러자 별 저항 없이 기대오는 몸이 보기보다 가벼워서 나폴레옹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문 앞까지 일리야를 데려가는 것이 꼭 마른 장작을 옮기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폴레옹은 두꺼운 나무문의 중앙에 달린 고리를 잡고 빠르게 세 번 문을 두드린 다음에 다시 느리게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곧 안에서 철컥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먼저 도착해있었던 가비가 나왔다. 그녀는 나폴레옹을 보고는 그 옆에 불안하게 서있는 일리야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하고 있는 몇 초가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일리야는 가비의 눈동자에 떠오른 수많은 생각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가비에게 일리야는 미소를 지을 힘이 없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 일리야.”

 

 

*

 

 

일리야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그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때때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러시아어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곤 했다. 꿈에서마저 저렇게 괴로워해야만 하는가. 그 옆에서 그를 내내 지켜보고 있던 나폴레옹은 양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일리야의 불행했던 과거를 놀림감 삼았던 첫 만남은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었는데도 먼저 제 과거를 가지고 공격해오는 모습이 아니꼬워서 그는 치기로 놀렸었다. 서른 줄이 넘은 지가 언젠데 여전히 어린 모양이었다. 나폴레옹은 마른세수를 했다.

 

Мама….”

 

미약하게 들린 목소리에 나폴레옹은 침대 위의 이불뭉치를 보았다. 이불에 파묻혀서 노란색의 머리카락만 보이는 일리야는 이제 연신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작게 웅얼대는 말에는 점점 울음이 섞여들었다. 가여운 사람. 나폴레옹은 얼른 일어나 침대가로 다가갔다.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일리야가 정말로 가여워서 그는 침대에 앉아 옹송그린 몸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나 두껍지 않은 이불 밑으로 느껴지는 떨림이 금방 가라앉지 않아서 그는 이불을 조금 걷어내어 일리야의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게 했다. 일리야는 꼭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을 한 방울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 위로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괜찮아질 거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정말로 괜찮아지는 순간이 오곤 했다. 점점 일리야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이제 괜찮아. 이는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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