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지기 전에 먼저 잘라냈어야 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앞에 두고 나폴레옹 솔로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침묵에 깊게 파묻힌 공간에서 생각하는 것마저 파문을 일으키듯 시끄럽게 들리는 상황에서 겨우 떠올린 생각이란 것이 고작 그 정도였다. 솔로는 진저리를 치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몸을 부르르 떨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과는 다르게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솔로의 앞에 있던 일리야 쿠리야킨은 굳게 맞물려 있던 입술을 살짝 벌렸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처럼 숨을 조금 들이마시는 아주 조그만 소리가 솔로의 귀에 들렸다. 그는 일리야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도 다음에 이어질 낮은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도 조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리야가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양날의 검 같은 혀를 휘두르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다. 마치 솔로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일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미약한 숨소리를 내고는 다시 입을 닫아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솔로는 그제야 일리야의 파랗게 빛나는 눈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힘을 빼고 아래로 축 쳐진 눈은 생각과는 달리 읽어낼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조금도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모양새에 솔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부러지기 전에 잘라냈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일리야 대신 자신이 입을 열기로 했다. 일리야가 원하는대로 이번엔 자신이 칼을 휘두를 차례였다.

"끝까지 꽉 막힌 빨갱이처럼 굴고 싶어서 그런 거 알아. 그런데 지금 이거 아주 이기적이고 지독하게도 자본주의적인 거야. 빨갱이라고 불러줬는데도 진짜 빨갱이가 되진 못했나 보군."

솔로는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서 테이블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일리야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단물만 쪽 빨아먹고 빈껍데기만 남으면 버려지는 건 사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냐.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예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일리야 쿠리야킨, 나폴레옹 솔로. 그거 알아? 네가 그 죽고 못 사는 어머니는 네가 정확히 보름 하고도 14시간 38분 전에 내 밑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 괴한에게 목숨을 잃었어."

마지막 말에 일리야는 왼손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이 질린 것을 제외하면 별로 놀란 기색도 없었다. 단지 그가 움찔한 것은 솔로가 다소 적나라한 묘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솔로는 이쯤에서 약간의 동정심이 들었다. 또 조금은 비참하기도 했다.

"진작 그만두자고 했어야 했지. 이렇게 가진 게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단 말이야. 그럼에도 지금까지 꾸역꾸역 버텼어. 가진 걸 두고 혼자 올인한 결과가 겨우 이거라고. 이건 러시안 룰렛이 아닌데도 넌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어. 지금 남은 턴도 하나인데 빈 탄창은 모두 돌아갔으니 총알이 관자놀이에 박힐 준비가 모두 끝난 거지."

솔로는 오른손으로 권총모양을 만들어서 자신의 관자놀이에 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일리야는 슬금슬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솔로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리야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을 뿐이었다. 거의 모든 것과 모든 것은 작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일리야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 끝을 조금 씰룩였다. 솔로는 일리야가 뭔가 말을 할 성싶어 잠시 기다렸다. 일리야는 우물쭈물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 끝을 여러 번 씰룩였다.

"넌 진짜 러시안 룰렛을 몰라, 카우보이."

솔로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오래 뜸을 들이다가 겨우 한 마디 한 일리야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독약이라고 다 쓴 것도 아냐."
"오, 그건 좀 빨갱이 같은 말이었어."

잔뜩 비꼬는 투에 일리야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솔로는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제는 화가 났다. 제발로 무덤을 파서 들어가겠다는 말을 쉽게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젠 그것이 옳다고 하기까지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깊게 박혀서 자라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박혀들었으니 끝까지 안고 갈 셈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했다. 가능성과 실제는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가 무에가 있기에. 솔로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면 정말로 진작에 잘라내버렸어야 했다. 부러지기 전에 재빨리. 스스로가 다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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