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단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지 못한 어느 파티 초대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대충 진열대 위에 올려둔 것에서 시작했다. 당시 임무의 목표 대상이었던 빈센트 슈미트는 한 달 째 시달리던 살해 협박에 못 이겨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돈 많은 자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최근 스포츠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마침내 축구 구단 하나를 사들이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그쯤 시작된 협박이 몇 번의 실질적 위협으로까지 이어지자 모든 바깥 활동을 멈추었다. 덕분에 며칠간 그를 지켜보던 퍼시벌까지 좀이 쑤실 지경이 되었을 무렵, 드디어 문밖으로 한 걸음 나선 슈미트는 턱시도까지 걸치며 한껏 치장한 채였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보내온 초대장에 회신 조차 하지 않던 그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아무리 멀린이라도 곧장 알아내기 힘들었으므로 퍼시벌은 그저 조용히 그 뒤를 밟으며 닭 쫓던 개 신세만 면하길 빌었다. 그렇게 빈 외곽의 한 저택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 북적이는 입구에서 실수인 척 옆 사람과 부딪치며 빼낸 것이 바로 그의 작은 박물관에 놓인 첫 수집품이 되었다.

 

퍼시벌은 그 후로 한참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파티 초대장을 잃어버린 남자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다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건만 어째서 그런 것일수록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부지불식간에 습격이라도 하듯 닥쳐오고 마는지. 퍼시벌은 뒤늦게 슈미트를 대신할 복수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앞에 우뚝 선 랜슬롯에게 할 말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껏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을 멀린 역시 비슷한 상황인지라 아까부터 조용하던 스피커에서는 한숨 소리만 흘러나왔다. 랜슬롯은 툭 치면 신랄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 자판기 같은 갤러해드라모락은 그를 지옥의 주둥아리라고 불렀다의 말문을 꽤 자주 막히게 만드는 인물이니, 멀린의 말문이야 진작에 막히고도 남을 만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두고 온 게 맞을 거예요.”

 

눈만 도르륵 굴리다가 뒤늦게 덧붙인 랜슬롯의 묘하게 의기소침하면서도 자신 있는 말이 멀린의 한숨을 더 깊어지게 했다. 그 뒤로 어차피 5050의 확률이잖아요.” 하는 한마디가 급하게 따라붙자, 보지 않아도 멀린이 책상 위로 상체를 약간 숙인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모습이 훤했다.

 

자네 말대로면 아닐 확률도 절반에 달해.”

하지만 아깐 정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두 개가 섞여 버릴 줄은 몰랐어요. 방금 기절시킨 사람이 그렇게 빨리 정신을 차릴 줄도 몰랐고요.”

 

랜슬롯은 울적하게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분명 반지도 제대로 작동했었다고 덧붙였다. 스피커에서는 한숨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넓어지고 있는 멀린의 이마에 기여한 지분을 매긴다면 랜슬롯이 최소한 절반 정도는 차지했을 것이다. 멀린이 욕을 하지 않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퍼시벌은 문득 치솟는 니코틴에 대한 갈망을 참아내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쨌든 작동만 잘 되면 괜찮을 거예요.”

 

랜슬롯이 입을 앙다문 모양새가 된 퍼시벌을 힐끔 보더니 전혀 위로답지 못한 위로를 했다. 퍼시벌은 말없이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랜슬롯의 주장대로 그가 바꿔치기해둔 디스켓이 제대로 된 쪽이 맞았다면 구소련의 망령 같은 위성 격추 시스템을 알카에다에 팔아넘기려던 동유럽 출신 불법무기 거래상의 단꿈은 2분 후면 영영 이뤄지지 못할 망상이 될 터였다.

 

차라리 2분이 2초 만에 지나가길 바라면서, 퍼시벌은 랜슬롯의 기행인지 실수인지 모를 일의 무력한 목격자가 된 것이 몇 번째인가 세어 보았다. 한 손을 다 쓸 필요도 없이 꼬박 네 번째였다. 그가 1년 반 남짓한 시간을 비밀 결사대를 표방한 현대식 부르주아의 그림자 집단갤러해드라면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게 표현했겠지만이나 다를 바 없는 이 조직에서 보내면서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건 어떤 면에서는 축하할 만한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를 포함한 다른 요원들도 자잘한 실수를 하고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자잘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급한 나머지 우산 손잡이를 반대로 돌려서 샷건 대신 스턴 건만 날린다갤러해드는 가웨인에게 신사의 덕목인 준비성에 부드러움까지 지나치게 갖췄다며 놀렸다거나 안경다리를 부러뜨려서 멀린에게 끔찍한 고주파를 선사한다놀란 멀린이 반사적으로 바닥에 패대기쳐버리는 바람에 망가진 헤드셋은 장만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꽤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지 그는 그 후로 장장 일주일은 우울해했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위성 격추 시스템을 실행하는 키가 담긴 디스켓과 그 시스템을 박살 내는 바이러스가 담긴 디스켓을 헷갈리는 것에 비하면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제 랜슬롯은 살짝 긴 코트 소매 끝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한껏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그를 따라 랜슬롯도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무기상이 구매자와 접선하기까지 1분이 채 남지 않았다. 퍼시벌은 랜슬롯이 조금은 초조해하기를 바랐으나 그에게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두 달 전에 방해전파를 내뿜는 장치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해서 발화장치가 몇 초 늦게 작동했을 때에도 퍼시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싱긋 웃기나 했었다. 갤러해드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읊는 신사다움에 뻔뻔함이라는 항목이 있다면 아마 랜슬롯이 최고점을 받았을 것이다.

 

시작했군.”

 

내내 말을 잃은 듯 조용하던 멀린이 드디어 입을 열자, 퍼시벌은 책상 위에 올려뒀던 노트북의 아무 자판이나 눌러 화면을 켰다.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흑백 영상에 노이즈가 심했지만 카메라의 각도도 괜찮았고 그럭저럭 누가 누군지 알아볼 만은 했다. 어느새 다가온 랜슬롯이 이쪽이 이고르 도브첸코니까 저쪽이 알카에다 쪽이겠네요.” 하며 화면 속에 등장한 두 사람을 하나씩 가리키며 친절하게 알려준 덕분그다지 고맙진 않았다이었다.

 

그 뒤로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집중하는 듯 보였던 랜슬롯이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고 작게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고 모두 조용히 숨을 죽이고 영상을 지켜보았다. 먼저 키가 멀대같이 크고 마른 도브첸코가 한참 무어라고 떠드는가 싶더니, 곧 랜슬롯이 알카에다라고 통칭했던 풍성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짧게 대답을 하고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쪽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가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며 나오더니 지퍼를 열어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절묘하게 가려지는 각도와 노이즈 때문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금괴네요.” 하고 단정 짓는 랜슬롯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십중팔구 금괴가 아니면 달러일 텐데, 개중에서 2년 전 911일에 미국을 직접 공격했던 이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내밀 만한 것은 금괴뿐이었다. 그리고 금괴를 확인한 도브첸코가 품에서 손바닥 만한 크기의 물건을 꺼냈다.

 

이번엔 정말 수습하기 만만치 않을 거야.”

 

멀린의 엄중한 경고에 퍼시벌이 랜슬롯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랜슬롯은 옆에 멀린이 있는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단순한 동의를 표하는 것인지, 멀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만,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는 것이 후자인 것 같기는 했다. 퍼시벌은 그나마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안도감이 들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경멸을 느끼며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도브첸코의 손짓에 대머리에 체구가 큰 남자가 화면 귀퉁이에서 나타났다. 그가 검은색으로 보이는 단단한 재질의 네모난 가방을 여는 데에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다이얼식이라고 짐작되는 자물쇠가 풀린 가방이 활짝 열려서 도브첸코 앞에 내밀어지는 동안 멀린이 차를 마시는 듯한 소리가 안경에서 흘러나왔다.

 

도브첸코는 디스켓을 꽂아 넣기 전에 거래 상대가 금괴로 가득한 가방을 내보였던 것처럼 자신의 가방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를 가방 앞으로 불렀다. 멀린이 감탄사처럼 환장하겠군.”하고 내뱉었다. 퍼시벌은 관망자적인 스스로의 위치를 절감하며 필시 멀린이 그 어떤 심리적 서스펜스를 주는 스릴러 영화보다도 지금을 더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도브첸코가 마침내 랜슬롯의 확률 게임을 끝장내버리는 행위를 하자, 랜슬롯을 포함한 모두가 당사자로 끌어 내려지는 기묘한 정적이 그들을 덮쳤다.

 

다들 수고했네.”

 

가장 먼저 입을 연 용감한 자는 멀린이었다. 그의 말투가 굉장히 홀가분해서 조금 이질적으로 들렸다. 퍼시벌은 가방 아래쪽 자판을 마구 두드리던 도브첸코가 이상함을 감지한 남자와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까지 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선지자라도 되는 듯이 맞을 거라고 했잖아요.” 하는 랜슬롯의 얼굴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니코틴 섭취에 대한 욕구가 다시 덮쳐오는 듯한 아찔함에 퍼시벌은 그제야 작게 한숨처럼 그래, 운 좋게도.”라고 내뱉었다. 그러자 생긋 웃는 랜슬롯을,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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