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조각 1

2015. 5. 17. 23:05

"사랑해."

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고작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그는 무책임했다. 그래서 그를 무심하게 힐끔 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늘 그만큼의 무게를 실어 말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를 마주보고 웃어줄 수 있는 정도의 무게는 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곧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고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실망도 큰 법. 나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그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아무렇지도 않나?”

입 안 가득히 퍼지는 밀크티를 음미하던 참이었다. 해리는 내가 타준 밀크티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나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몇 가지의 감정을 희미하게 드러냈는데 나는 구태여 그것들이 무슨 감정인지 알고 싶지 않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흥.”

해리는 조금 어이가 없는 듯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다시 밀크티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해리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드디어 찻잔을 들어 밀크티를 마셨다. 그는 밀크티를 모두 마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침묵 속에는 로열 블렌드의 향과 찻잔의 온기만이 있었다.

찻잔이 받침 접시에 살짝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해리를 보았다. 내 손에는 아직도 미지근한 밀크티가 반쯤 남은 찻잔이 있었다. 나는 양 손으로 소중한 것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로 찻잔을 둥글게 감싸 쥐고 있었다.

“모른 체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하는 게 좋을 테지.”

나는 해리의 시선을 피했다.

“수고하게.”

해리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나는 문 쪽을 보았다. 손 안에서 식어가는 밀크티를 마저 마시기 싫어졌다.



중동에서의 장기임무를 막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제임스 아니, 란슬롯과의 위태로운 관계가 지속되면서 나와 그에 대해 잘 아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제외한 요원들은 우리를 대하기 껄끄러워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나에 대한 시선이 이상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상하다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만 정말로 그들의 시선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본래 남의 시선을 잘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 기분이 점점 언짢아지고 있었다.

아서가 기다리는 방으로 가는 마지막 복도에 들어서서야 그런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앞에는 해리가 있었다.

“갤러해드.”

해리는 할 말이 있는 듯이 내 앞에 똑바로 섰다. 그는 곧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잠시 할 말을 고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그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상한 시선들을 견디느라 신경이 약간 곤두선 상태였던 나는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우려했던 일이 생겼네. 이렇게 말하니 꼭 진부한 드라마 속 대사같이 들리지만 말이지.”
“우리 모두가 우려하는 일이라면 다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갤러해드.”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군. 사과하지. 자네‘들’에 대해 우리들 나머지가 우려했던 일이 생겼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네보다 란슬롯에 대해서 우려했던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단박에 이상한 시선들이 이해되었다. 아서에게 보고하는 일은 뒤로 미뤄졌다.


퍼랜 퍼시벌랜슬롯 퍼시발랜슬롯 퍼시벌란슬롯 퍼시발란슬롯

'ARCHIVE > KINGS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랜] 선택  (0) 2015.05.17
[퍼랜] Respice, adspice, prospice  (0) 2015.05.17
[퍼랜] 수선화  (0) 2015.05.17
[퍼랜] 러시안룰렛  (0) 2015.05.17
[퍼랜] Prologue  (0) 201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