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빛바랜 꽃잎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만 같았다. 희게 빛나던 꽃잎이 어쩌다가 이렇게 말라비틀어졌나. 퍼시벌은 별 의미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흰 수선화의 잔상은 그의 눈앞에 여전히 희미하게 남았다.

“To Lancelot.”

가웨인의 목소리에 퍼시벌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가웨인은 발렌타인의 범지구적 범죄의 날에 입은 상처를 여전히 달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고 새끼손가락이 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는 꽤나 침통한 표정이었다. 꾸며낸 감정이 아닌 진실된 감정. 퍼시벌은 가웨인의 시선을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이미 수 초 전에 보았던 것이 스크린에 떠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엉성하게 꿰맨 자국이 고속도로처럼 얼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일부러 테이프를 붙여가며 뜨이게 해둔 눈에서는 희한하게도 찰나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퍼시벌은 구태여 그 감정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삐딱하게 가웨인 쪽으로 약간 얼굴을 틀고 있는 자세 그대로 눈만 굴려 그 얼굴을 보았다. 동공이 확장된 눈의 홍채는 여전히 청량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퍼시벌은 일순 조금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오싹함이 전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가웨인 역시 그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결국 먼저 돌아선 것은 가웨인이었다. 퍼시벌은 그저 시선만 스크린에서 거두었다.

“흰 수선화가….”

멀린은 퍼시벌을 보았다. 퍼시벌은 식탁 가운데 놓여있는 검은 화병 속에 시든 붉은 색의 튤립을 보고 있었다. 전대 아서의 취향이었다. 퍼시벌의 눈빛은 마치 그 튤립이 전대 아서인 것처럼 일렁였다. 멀린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흰 수선화가….”

퍼시벌은 끝내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곧 방을 나가버렸다. 멀린은 퍼시벌이 있던 자리 앞에 한 입도 대지 않은 나폴레옹 브랜디 한 잔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


퍼시벌은 둥근 탁자 위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꽃들을 감싼 희고 얇은 종이가 탁자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퍼시벌은 답답할 정도로 단춧구멍을 다 채웠던 재킷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도 풀어서 대충 소파 위에 걸쳤다. 그리고 찬장에 놓아두었던 스코치 위스키를 꺼내었다. 얼음도 넣지 않은 잔으로부터 스모키 위스키 특유의 강한 향이 퍼지기도 전에 그는 잔을 비워버렸다. 그리고 다시 위스키를 잔에 가득 채워서 또 한 번 잔을 비워냈다.

추모주랍시고 마셨던 나폴레옹 브랜디가 이토록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가. 퍼시벌은 전대 아서의 마지막 전체회의 소집을 회상해보았으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세 번째로 가득 채운 잔을 들고 수선화 다발을 올려둔 탁자 앞으로 와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선화 특유의 달달한 냄새는 훈연기의 강한 향에 밀려 더 이상 맡을 수 없었다. 퍼시벌은 잠시 흰 수선화들을 보다가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종이가 그의 손 안에서 우그러들며 소리를 냈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아, 그는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버렸다.

란슬롯 아니, 제임스를 처음 보았을 때 퍼시벌은 수선화를 떠올렸다. 퍼시벌은 꽃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제임스를 보자마자 수선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 이미지 속의 꽃 이름이 수선화인지도 몰랐다. 수선화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순전히 길을 가다가 꽃집에서 수선화라는 명패를 걸고 수선화를 파는 것을 보고서였다. 노란 영국 수선화(British daffodils)는 달달한 향 끝에 톡 쏘는 박하향을 품고 있었다.

퍼시벌은 흰 수선화 속에 얼굴을 파묻고 향을 맡았다. 깊이 내쉬었던 숨을 다시 깊이 들이쉬자 위스키 향을 밀어낸 달콤한 향과 그 끝의 박하향이 그의 폐부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깊이, 더 깊이. 더 이상 들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감은 눈 안으로 까만 시야 속에 스크린 속의 얼굴이 떠올랐다. 깊이 들이켰던 수선화 향을 다시 내뱉기가 두려웠다.

“제임스.”

조심스럽게 그의 입 밖으로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생전에 그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이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있었던가. 퍼시벌은 다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제임스, 제임스, 제임스, 제임스, 제임스. 들이켰던 수선화 향은 모두 제임스의 이름으로 내쉬어졌다. 달콤하고 끈적한 키스를 한 후에도, 쾌락에 젖어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도, 한 번만이라도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고도 절대로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퍼시벌은 흰 수선화를 내려다보며 지친 표정을 지었다.

바스락거리는 흰 종이가 벗겨지고 푸른색의 줄기를 드러낸 흰 수선화는 탁자 위에 올려둔 위스키 잔에 담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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