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랜멀랜] KISS

2015. 5. 17. 23:09

뉴스에서는 꽤 자주 소중한 이를 눈앞에서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곤 했다. 사고, 전쟁, 범죄 등의 간결한 단어로 분류되는 사건들 속에는 반드시 희생자를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뉴스라는 거름망을 거치면서 그 뒤로 숨겨질 뿐이었다. 멀린은 자신이 바로 그 걸러진 사람들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누군가 알게 된다면 지나친 피해망상의 한 종류가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그는 종종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하 벙커 같은 방에 수많은 컴퓨터 장치와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아서 일하는 것은 안전하고 좋은 것일진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멀린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Crap.

멀린이 맡은 일은 결코 사무실의 화이트칼라가 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소중한 동료들이 사지(死地)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원격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동료들의 최후를 멀리에서나마 지켜봐주는 것이었다. 음지에서 일하는 직업의 특성상 그들의 마지막은 대부분 좋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서 시신마저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그 비극적인 최후를 보는 것이 바로 멀린만이 알고 있는 그만의 비밀임무였다.

그래서 멀린은 란슬롯이 임무를 나갈 때마다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란슬롯은 킹스맨내에서 안경을 안 쓰기로는 소문난 사람이었는데, 이 안경이야말로 멀린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물론 란슬롯도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멀린의 성화에 못 이겨 안경을 써주는 넓은 아량을 발휘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안경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란슬롯이 안경을 쓸 때는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라는 말도 되었다. 그러니 까맣게 꺼져있던 조그만 화면에 영상이 수신되면 멀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마는 것이었다.

“멀린?”

란슬롯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들렸다. 멀린은 상념을 떨쳐내고 그를 보았다. 잠에서 덜 깬 녹색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져있었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란슬롯의 얼굴에는 군데군데 생채기가 나있었고 왼쪽 뺨 위에는 아예 희고 넓적한 거즈가 붙어있었다.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해.”

란슬롯은 눈을 조금 더 똑바로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멀쩡한 상태였더라면 꽤나 근사한 미소였을 텐데. 멀린은 그의 힘없는 미소가 못내 안타까웠다. 그 안타까움을 채 숨기지 못해서 멀린의 눈썹이 아래로 조금 쳐졌지만 란슬롯은 그걸 알아챌 만큼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멀린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끔찍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란슬롯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오른팔 위로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란슬롯은 조금 더 멀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더 자도록 해. 새벽이기도 하고 자넨 환자니까.”
“안경.”
“안경?”

멀린은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그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고 병상에 누워있는 란슬롯 역시 그랬다. 란슬롯은 마구 가라앉고 갈라지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기 위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래요, 안경. 이번에는 절대로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란슬롯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멀린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멀린은 숨을 들이쉬며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멀린의 임무는 임무라기엔 차라리 고통스러운 형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다른 기사의 이름으로 현장에서 뛰던 것을 그만두고 이 자리에 스스로 온 것도 지금의 멀린 자신이 내린 선택이었다. 전대 란슬롯의 뒤를 이어 제임스가 현재의 란슬롯이 된 이후로 오랫동안 기사들의 세대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말인즉, 멀린이 무려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기사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 하는 잔인한 형벌을 받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업무의 성격상 다른 이들의 죽음을 보았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란슬롯이 안경을 쓰지 않은 이유는 멀린의 임무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비록 누구도 자신의 시신을 찾지 못할지언정 멀린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안경을 쓰는 것도 그가 살 가능성이 높을 때에 한해서였다. 란슬롯은 이번에는 정말로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이 맞다하고 판단했었다. 사실 임무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이었다. 텔아비브에서 만난 모사드 요원이 접선이 끝나자마자 암살당한 것과 그가 넘겨받은 정보의 중요성 및 그것을 노리는 조직의 정체를 두고 단순히 확률적으로 계산했을 때 그는 제 목숨을 부지할 확률을 10%미만으로 보았었다.

그런데 결국 안경을 쓴 것은 마지막 인사를 남겨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육탄전 끝에 폭탄을 눈앞에 두었을 때였다. 그는 란슬롯이 아닌 인간 제임스로서 그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어차피 폭탄이 터지면 산산조각이 되어 형체도 찾을 수 없는 몸이 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제임스를 살렸다. 정확하게는 멀린이 그를 살리고야 말았다.

“그때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멀린. 일이 그렇게 되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래도 진심이었습니다.”
“제임스.”

멀린은 제임스가 더 이상 말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뜻한 제임스의 체온을 살짝 감쌌다. 그리고는 손을 뗐다. 제임스는 자신의 팔을 감쌌던 손이 사라진 자리에 시원한 공기가 닿는 것을 붕대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멀린.”
“다시는 그런 멍청한 생각하지 마.”

낮은 멀린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제임스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도 단단하게 굳은 것을 보았다. 멀린은 몸을 살짝 일으켜서 제임스의 부르튼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미열에 바싹 마른 입술에 앉은 피딱지에 멀린의 혀가 닿았지만 제임스는 오히려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두 혀가 스친 것도 잠시, 멀린은 금방 떨어져나갔다. 제임스의 바짝 말랐던 입술이 번들거렸다.

“뒷일을 걱정하는 건 네 몫이 아냐, 제임스. 살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멀린은 말끝을 흐렸다. 제임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묘했다. 제임스는 멀린이 말을 마저 잇기를 기다렸다.

“푹 쉬도록.”

멀린은 뒷말을 남긴 채로 병실을 나갔다.







+ 첫 번째로 멘션온 캐와 두 번째로 멘션온 캐를 키스시키는 해시태그


랜멀 멀랜 랜슬롯멀린 란슬롯멀린 멀린랜슬롯 멀린란슬롯 란멀 멀란

'ARCHIVE > KINGS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랜] Te fuiste  (0) 2015.05.17
[퍼랜] Timeline  (0) 2015.05.17
[퍼랜] 선택  (0) 2015.05.17
[퍼랜] Respice, adspice, prospice  (0) 2015.05.17
[퍼랜] 수선화  (0) 201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