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핏파이어가 무동력 상태로 바람을 따라 해변을 활강하는 동안 조종석에 구겨져 앉은 파리어는 머리 위를 덮은 유리창을 열었다. 아래쪽에 줄지어 늘어선 군인들의 함성과는 달리 무거운 전운이 짙게 깔린 덩케르크 해변을 따라 흐르는 바람이 서늘하게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6월을 넘긴 때의 바람은 아직 태양에 달구어지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했다. 늘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도 항상 자신을 뜨겁게 태우는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는 법이었다. 파리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그의 기억 속 노란 머리칼은 밝은 빛을 담뿍 받은 저 아래 해변의 모래알과 다르지 않았다.

 

무사하겠지?’

 

기체가 완전히 나치가 점령한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남의 일 마냥 지켜보며 파리어는 이미 반쯤 확신이 담긴 질문을 떠올렸다. 주어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가 주어 자리에 있어야 할지는 명백했다. 철자 하나라도 떠올리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 것 같은 이름이 들어갈 자리였다. 평소에는 그리 쉽게 소리 내어 부르면서도 막상 이럴 때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마 제 감정을 겉으로 숨길 줄만 알지 속에서까지 숨기는 방법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어는 픽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앞일이 뻔한데 겨우 그게 뭐라고 싶은 생각이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다가도 다시 그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 왼쪽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해안가의 파도가 다소 거친 데 비해, 멀리 수평선에 가까울수록 물결은 잔잔하게 어른거렸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건너편의 육지를 든든하게 떠받들고서, 바다가 푸르디 푸르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애쓰던 게 무색했다. 파리어는 종종 정면으로 바라보면 거대하게 밀려오는 해일 같은 감정에 휩쓸릴까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눈동자가 대양의 푸른빛을 띄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가 하늘을 날면서도 하늘보다는 바다에 압도되곤 했던 이유였다. 언젠가 그에게 하늘을 동경해서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냐 묻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약간의 망설임 때문에 그렇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건 분명 거짓이었다. 하늘에서는 땅에서만큼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탄할 수 없었다.

 

 

 

◉◉◉

 

 

 

겨우 전투기를 띄울 만한 날씨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보다도 매시간 방향이 바뀌는 강한 바람에 기지 중간쯤에 높게 걸린 유니언 기가 이리저리 팽팽하게 끌려다니며 내는 펄럭이는 소리가 불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허리케인에 비해 이착륙 시 조금 더 까다로운 기술을 요하는 스핏파이어에 아직 장교 임명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이들을 태우기엔 퍽이나 안심이 될 터였다.

 

어림도 없는 소리야!”

 

기지의 본부 건물 입구로 막 들어서던 파리어는 한 장교가 크게 일갈하는 말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소령을 표하는 리본이 소매에 매달린 제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장교는 상기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며 서 있는 다른 장교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소령의 앞에 있는 장교는 딱 보아도 앳된 얼굴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것처럼 보였다. 굳이 그의 계급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소위일 게 분명했다. 또 한 번의 큰 전쟁이 발발하자 겨우 성년을 넘긴 애국자들이 군대로 밀려들었고, 그들 중 몇몇은 이곳 펠트웰 공군기지로 온 지 이제 보름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훈련을 재개해야.”

이봐, 자네가 스핏파이어를 얼마나 탔지? 150시간 중 얼마나 탔냐는 말이야. 그 중 절반은 타 보았나?”

 

어린 소위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소령은 한숨을 쉬었다.

 

혈기가 왕성할 때라는 건 이해해. 하지만 일단 대기하게. 이런 날씨에 훈련이랍시고 출격했다가는 모조리 죽어. 저기 국기가 날리는 걸 보았나?”

 

소령이 조금 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투로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제 앞에 선 소위를 어르고는 곧 자리를 떴다. 그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던 파리어는 대강 어떤 상황인지 짐작했다. 애국심뿐만이 아니라 투지까지 갖춘 젊은 장교가 하루 훈련을 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다. 소위의 푹 숙인 이마 위로 몇 가닥 뻗친 까만 머리칼을 조금 더 바라보던 파리어는 소위가 고개를 들기 직전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왠지 까만 머리 위로 반짝이는 금발이 겹쳐 보인 탓은 아니었다.

 

사실 파리어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10대 시절에 이미 큰 전쟁을 한 번 겪은 그가 집안의 소극적인 반대(장남도 아닌 그에게 집안에선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를 뿌리치고 공군에 입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맘때의 그에게 감히 애국심이라고 불릴 만한 게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쨌거나 당시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전쟁의 참상도 후유증도 젊은 파리어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나름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그게 그가 입대한 계기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나중엔 한 사람 몫을 당당히 해내는 것으로 참 쉽게도 변질되었다. 오랜 훈련 기간을 거쳐 갓 임관한 장교가 실전에 투입되는 순간 그동안 배운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충격은 문화충격에 비할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은 베테랑 에이스 소리를 듣는 파리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파리어의 후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의 후임은 방금 전에 본 소위처럼 직접 상관을 찾아가 항의할 정도로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파리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기들 중 그래도 뛰어난 편에 속한다는 후임 장교가 첫 실전 비행작전에 투입된 건 고작 이틀 전이었고, 작전 내내 침착함을 가장한 떨리는 목소리를 내던 그는 귀환하자마자 바로 의무실로 가서 저녁 식사시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돌아왔다. 그러고도 애써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던 하얀 얼굴에 파리어는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그동안 그를 거쳐간 후임이 대여섯은 족히 되는데도 그렇게까지 안타깝게 여겨진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유독 아이처럼 뽀얀 얼굴이 언뜻 전쟁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일까. 파리어는 벌써 이번 전쟁이 이전 전쟁보다 더 크게 피부에 와닿는다고 느꼈다.

 

대위님?”

 

복도를 울리며 저를 부르는 소리에 파리어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생각에 잠겼던 건지 고개를 들자 아까 보았던 어린 소위보다는 아주 조금 더 어른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어디 가십니까?”

, 그게.”

 

파리어는 말을 얼버무렸다. 사색을 하느라 어딜 가는 길이었는지 정말로 잊어버렸다. 게다가 사색의 주인공인 말간 얼굴의 후임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니 당황한 탓도 있었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당황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젠장.’

 

결국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킨 파리어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보다 키가 좀 더 커서 내려다보는 후임의 시선이 의아함에 물들었지만, 후임은 구태여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꽤나 눈치가 빠른 편인 데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 만큼의 참을성도 뛰어났다.

 

자네는, 콜린스 소위?”

대위님을 찾아뵈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를?”

.”

 

이번에는 파리어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콜린스가 갑자기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면서 우물쭈물했다. 평소에도 자주 파리어를 찾아 비행전술이나 그 밖의 궁금한 것에 대해 온갖 질문공세를 퍼붓던 기세는 어디 가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임 장교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주 큰 결례는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콜린스의 모습에 파리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엇 때문이지?”

, , 그것이.”

 

파리어의 재촉에 콜린스는 어깨를 움찔 떨고는 재빠르게 주위를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발간 얼굴로 작게 말했다.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파리어는 곧장 콜린스의 곁을 스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는 본부 건물에서 나가는 뒷문이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며 파리어가 뒤에 멍하니 남아 있을 콜린스에게 따라오라고 외쳤다. 곧 콜린스가 뒤따라 걷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온 파리어는 계속해서 건물 뒤뜰의 구석진 곳까지 성큼성큼 걸었다. 콜린스가 두세 걸음 정도 뒤쳐져서 따라오는 걸 느끼며 파리어는 과연 저 후임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뛰어난 훈련성적으로 동기들보다 조금 더 일찍 기지로 차출되어 온 콜린스는 한 달 가량 되는 시간 동안 파리어나 팀 리더인 캔필드 소령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파리어도 캔필드도 원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긴 했으나 콜린스는 오히려 이쪽에서 궁금할 정도로 하지 않았다. 아직 한 팀이 되어 훈련과 실전을 병행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기엔 어쩌다 대화가 가족을 주제로 흘러갈 때에도 콜린스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보다 대강 넘겨짚을 뿐이었다. 그래서 파리어는 내심 콜린스가 드디어 팀원으로서 약간의 사적인 부분도 공유할 만큼 마음을 여는 걸까 하여 흥분되었다. 물론 파리어가 겉으로 티를 내거나 티를 낼 만큼 흥분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가 흥분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각했다면, 그게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인지 생각하느라 콜린스의 말을 못 들었을 테니까.

 

, 대위님. 대위님은 왜 공군에 오셨습니까?”

 

갑자기 뒤에서부터 닥친 질문에 앞서 걷던 파리어는 우뚝 멈춰 섰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뒤로 돌아서자 콜린스는 바닥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여기 온 게. 아니, 제가 과연.”

콜린스.”

 

정리되지 않은 말이 앞다투어 입술을 비집고 나와서인지 콜린스는 난감한 얼굴로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말했다. 그런 그를 파리어가 멈춰 세우니 표정이 조금 울상이 되었다. 감정이 참으로 잘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파리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아까 본 흑발의 어린 소위가 떠올랐다. 어째 잠잠한 것 같더니 때마침 터진 모양이었다. 콜린스의 축 처진 푸른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잘했다고 한 거, 그거 거짓말 아냐.”

 

파리어가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콜린스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이 붙박여 있었다. 파리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다만, 이번에 그는 겉으로 과장하여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좋아. 다르게 얘기하지. 막상 해보니 겁나고 쓸모없는 놈 같이 느껴질 거야. 그런데 그게 정말 맞는 생각일까? 이봐, 소위, 자네가 언제는 쓸모있었나? 아직 실망하긴 일러.”

 

파리어는 조금 전과 달리 상당히 건조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콜린스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하며 놀란 눈으로 파리어와 시선을 마주쳤다. 약간 멍해 보이기까지 하는 콜린스의 눈동자를 파리어는 잠시 동안 쏘아보았다. 이 정도면 충격이 갔을 테다. 이제 콜린스가 빨리 깨닫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존재의 이유를 찾는 생물이라서 이것도 당연히 거쳐가는 과정이었다. 그걸 젊은 파리어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에게는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콜린스에게는 파리어가 있었다. 아니, 지금 같은 전시에는 굳이 파리어가 아니더라도(혹은 친절하지 않더라도) 그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기지 내에 족히 몇 백명은 있었다. 전투기 조종사는 귀한 존재였으므로 이곳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면 윗선에서는 다른 곳에서라도 사람을 구해왔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장에는 파리어가 있었고, 그 사실에 파리어는 크게 안도했다.

 

한동안 얽혔던 시선을 먼저 다른 곳으로 돌린 이는 파리어였다. 그는 아직도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구름 뒤에 숨어 있는 해가 지는 모양인지 회색빛 하늘이 더 어둑어둑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를 하라고 종이 울릴 것이다. 파리어는 여즉 멍하니 저를 보는 콜린스를 다시 힐끔 보았다.

 

내일 보지.”

 

 

 

◉◉◉

 

 

 

거의 기계적으로 착륙을 준비하면서 파리어는 하얀 분필로 표시해둔 숫자들을 보았다. 처음 연료 게이지가 박살났을 때에 표시해둔 것부터 콜린스가 바다로 추락하면서도 알려주었던 연료량을 적어둔 것까지. 파리어는 그게 마치 마지막으로 보는 연인의 사랑스러운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모래사장 위로 내려앉는 스핏파이어를 통해 중력을 느끼면서 그는 흡사 자신이 죽음의 동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반쯤은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이기도 했다. 덩케르크 해변에 모인 무력한 군대를 향해 폭격을 퍼부으려는 ME 109E를 격추하느라 그가 아군쪽에 착륙할 수 있는 기회를 과감히 던져버린 건 사실이었다. 착륙하기 전에 이미 그의 운명은 정해졌던 것이다.

 

스핏파이어의 착륙을 모두 지켜봤을 독일군이 오기 전에 파리어는 신속하게 조종석을 빠져나와 조명탄을 조종석에 놓아둔 지도 위에 쏘았다. 비록 조명탄이지만 종이에는 금세 불이 붙었다. 파리어는 모래 위로 뛰어내려 발을 디디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앞날을 절감하며 마스크와 비행모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독일군에 포로로 끌려가 언제 영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드디어 피부로 느껴졌다.

 

아니, 그것보다도 어쩌면 다시는 콜린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파리어를 괴롭게 했다. 벌써 활활 타오르며 전투기의 뼈대만 남기고 있는 붉은 화염처럼 강렬한 고통이 그의 마음을 통째로 태우고 있었다. 그 선연한 통감에 파리어가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헐떡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고통에 허덕였다. 그의 등 뒤에는 그토록 푸른 바다가 있는데 돌아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온몸이 불에 타 재가 될 것만 같아서, 다시는 해협 건너 하얀 절벽 위를 날아다닐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