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어콜린스 교류전 윙티에 나올 회지 미리보기 2








런던은 전체가 거대한 시장처럼 번잡했다. 땅으로 쏟아질 낮고 우중충한 하늘이 뒤를 주기라도 하듯 서늘한 바람이 거리마다 휘젓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어두운 광경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템스강의 남쪽으로 시내 중심부와는 떨어진 브릭스턴에도 점심시간의 끝자락을 붙들려는 이들이 많았다. 시장으로부터 뻗어 나온 각종 상점들이 양옆으로 길게 나열된 데다 튜브 역이 있는 브릭스턴 로드는 특히 붐비고 있었다. 파리어는 어깨를 움츠린 채로 사람들 사이의 빈틈을 용케도 찾아서 파고들며 재바르게 걸었다. 정확히 걸음에 번씩 부연 날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은 챙이 있는 까만색 모자를 눌러쓰고 회색 코트를 입은 여느 남자들과 별로 다를 없었다. 하지만 모자 아래 언뜻 보이는 햇볕에 잘 그을린 그의 얼굴과 묘하게 날이 서 또렷하게 빛나는 옅은 초록색 눈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얼핏 차가운 도시의 신사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강렬함이 엿보였던 때문이다. 이는 사흘 전만 해도 그가 이스탄불부터 카이로까지 중동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던 것과 얼마간 관련이 있었다. 중동의 상황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겪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좋았던 때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흐루쇼프가 2년 전의 연설로 촉발한 베를린 위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지중해 연안에도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종교, 정치, 이념이 혼합된 거대한 문제에 각종 시위는 물론이고 저항군까지 서구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들고 나서는 혼란 속에 해운업자로 둔갑한 스파이가 되어 뛰어드는 건 실상 정보부가 파리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게 아니라 일종의 유배를 보냈다고 보는 게 더 적합했다. 파리어는 대체 자신이 왜 상부의 눈 밖에 났는지 알지 못했으나 딱히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스파이 사회에도 위계는 있었기에 그가 가장 밑바닥인 청소부(암살 전문 요원)로 경력을 시작한 탓이리라 짐작하면 피차 편했다.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모퉁이를 돌아 스톡웰 로드로 접어들면서 파리어는 이렇게 급하게 런던이 자신을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중동 지부장의 바로 아래 자리까지 겨우 올라오는 동안 본부에서 그의 이름을 콕 집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헝가리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긴급 투입할 요원을 찾던 런던에서는 임시 파견 요원이라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단어를 썼다. 그래서 며칠 전 영국에서 온 지급 전보를 받았을 때 파리어가 적잖이 놀랐던 건 당연했다. 수신인 칸에는 그의 가짜 이름인 애쉬 포드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고, 숫자들로 이루어진 내용은 당장 런던으로 오라고 해석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파리어는 자신이 좋은 일로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받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런던 지부장이나 되는 인물이 만나자고 한 데에 최악의 이유가 있는 것만 아니길 바랐다.


곧 횡단보도를 건넌 파리어가 극장 뒤쪽의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닫히는 문에 매달린 방울이 땡그랑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추운 바깥 공기가 파리어와 함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문 옆에 붙은 계산대 뒤에서 종업원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님에게 하는 인사말조차 건네지 않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파리어를 훑어보더니 빈자리를 향해 손짓했다. 작은 동네 식당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파리어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공간에 테이블은 여섯 개가 놓여 있었고, 출입문에 가장 가까운 자리를 빼고는 모두 손님이 있었다. 그래서 좁은 식당이 더 좁아 보였으나 가운데에 통로가 있어 각 테이블 사이는 꽤 여유로웠다. 근처에 사는 주민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저마다 일행과 떠들기 바빠 보였는데 거기에 가게 안쪽 선반 위에 놓인 TV 소리가 더해지니 왁자지껄한 시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선반 아래쪽 자리에는 중년 남성이 홀로 먹다 만 라비올리를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파리어는 그 남자를 보며 런던 지부장이 왜 이곳을 고른 건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중략 ~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뭡니까?”


~ 중략 ~


이번엔 그가 이 일을 맡았어. 하지만 그는 직접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없지. 그러면 사람을 써야 하는데, 자네라면 누굴 믿을 수 있겠나? 빅 브라더도 모르게 창고를 터는 이가 어디 있을지 알고?


로버트가 짐짓 아이를 나무라듯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파리어는 그가 리처드 정보부장을 성경 속 신의 대명사처럼 부른다고 생각했다.


자네도 평생 바깥만 나돌고 싶은 건 아닐 텐데. 서로 득이 될 거라고.

꼭 무슨 거래라도 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자칫 비웃음으로 들릴 수 있는 말임에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져 로버트는 뒤로 상체를 조금 물렸다. 파리어가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파리어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로버트는 그를 선발한 캔필드의 친우였다. 캔필드는 갓 18세가 된 파리어를 이스트 엔드의 어느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아직 어렸던 파리어를 불꽃에 비유했다. 당장에는 어디로 튈지 모를 폭죽 같아 보여도 약간의 도움만 받으면 날카롭게 타오를 화염이 될 거라던 캔필드의 눈은 과연 정확했다. 그가 기대한 대로 젊은 청소부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정보부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이후로 비록 해외 지부를 전전하긴 했으나 파리어는 가는 곳마다 여러 작전을 성공시키고 기존의 정보망을 더 확장하는 등 우수한 실적을 많이 쌓았다. 중동 현지에서 그가 고작 1년 만에 제임스 지부장보다 더 큰 신뢰를 얻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실은 캔필드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정보부를 떠나면서 이미 천출 취급을 받던 파리어에게도 여파가 미친 건 차치하고, 어떤 계략이 파리어 뒤에 똬리를 틀었을 거라고 의심을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로버트가 이제라도 친우가 아끼던 요원을 대신 돌보아 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다. 그런 알량한 친절을 베풀기에 그가 책임져야 할 식구는 충분히 많았다. 따라서 그는 파리어의 말마따나 양쪽에게 유리한 단 한 번의 거래를 제시함으로써 최소한의 보답을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싫다는 건가?


파리어는 쓴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로버트의 속사정이야 어떻든지 파리어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그의 의사를 물어 볼 거였다면 애초에 그가 영국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다.


아닙니다.

좋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로버트는 드디어 담배를 피울 요량으로 주머니에서 은색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휙 스쳐보기에도 오래된 듯한 라이터의 몸체에는 상처가 많았고, 옆면에는 음각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파리어는 로버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왕관을 쓴 튜더 로즈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호텔에 짐을 풀었던데, 프런트를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연락은 직통으로 하게.


로버트가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서 웅얼거리며 말했다. 파리어는 천장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여전히 혼자 허공에 소리치고 있는 TV를 보았다. 네모난 흑백 화면에는 뉴스 앵커들이 내일로 다가온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모습이 번갈아 나왔다. 그것을 본 파리어가 무언가 말하려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로버트는 새로이 연기를 한 줄기 뿜어내면서 마치 앞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레 포크로 라비올리를 꾹꾹 찌르고 있었다. 파리어는 살짝 벌렸던 입을 닫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첫 번째 비밀 회담은 이미 끝나 있었다.